


끝없이 만족하고 싶다면, 생각을 멈추지 마.
가치를 휘어잡아.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방패가 있었으면
좋겠어! 으힛, 하고 싶은 게 많으니까."

♛ 달라진 점
지금까지와는 다소 다른 분위기. 늘 여유롭고 나긋했던 분위기가 침잠하고, 어쩐지 위태롭다는 인상을 준다. 피곤에 절어 내려온 다크서클과 달라진 복장, 달짝지근 하면서도 알싸한, 위험하다 느낄리만치 독한 향이 그 원인인듯 했다.
가장 근본적인 원인을 거슬러 짚으면 그의 변화는 반년 내내 진행한 실험 탓이었다. 기존에 즐겨입던 품이 넉넉한 옷은 벗어던지고 어깨에 언제든 입을 수 있도록 실험가운을 늘 걸치고 다녔다.(둘이 지냈던 현실의 실험실에서는 종종 볼 수 있는 모습이었지만 다른 피스들에게는 처음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몸에 딱 붙는 상의는 활동에 방해 받지 않으려는 그의 합리적인 성정을 보여주었고, 머리칼은 실험에 방해된다고 나이아에게 부탁해 한번 단발로 잘랐지만 금세 다시 자라 쇄골 아래를 한참 내려가버렸다. 흥미에 겨워 밤잠 설쳐가며 실험을 진행한 까닭에 피곤으로 찌들은 얼굴. 그와 동시에 호기심으로 형형히 빛나는 눈동자는 이질적이었다. 늘 격앙되어 있는 상태인지 이번만큼은 눈동자가 보일만큼 거진 항상 크게 뜨고 다니고 있다. 대화는 예전과 다를 것 없이 순조로이 진행되는 편이지만 간간히 특정 키워드를 건드리면 흥분한 것마냥 말이 빨라져 상대방의 혼을 쏙 빼놓곤 했다.
여기서 더 자랄 게 있나? 싶었는데 더 자라버렸다. 레이븐과의 실험을 진행하며 자신에게도 영향이 온 것이라 추측중. 성장이 아닌, 반영에서의 변화의 일부였다. 또한 몸 위에는 수술자국과 같은 검은 흉이 좀 더 생겨났다. 특히 심장께엔 난도질한 것마냥 잔뜩 흉져있다고. 옷에 가려져 있어 보통 볼 수는 없다. 그 외에 눈에 띄게 변한 점은 없어보인다.
머리카락은 옆에서 아래로 땋아 나이아가 준 리본으로 묶었고, 디아네가 준 목걸이를 착용, 또한 그녀가 건네준 위험하리만치 달짝지근하면서 알싸한 향수를 뿌리고 다녔다. 디어가 준 초록빛 리본은 왼쪽 손목에 묶었다.
♛ 경험
미친 과학자가 일을 냈다.
저번의 여유 시간엔 아예 손을 놓아버리더니 추진력을 모으기 위함이었을까? 이번엔 동시에 3개의 실험을 진행했다. 그 중 메인은 ‘반영세계에서 현실로 나갈 수 있는가.’ 무생물은 반영에서 현실로 나가는 것이 가능하므로 잠시간 완전히 숨을 죽였다가 반영의 밖으로 보낸 뒤 다시 살아나게 한다면 가능하지 않을까,하는 것이 그의 이론. 그러기 위해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도록 하는 약물과, 반영의 밖으로 보내는 기계가 필요했다.
전자를 만들어내기 위해 나이아는 14번 죽었다. 15번째에는 완전히 죽었다가, 3시간 후에 죽었던 그 몸으로 살아났다고. 그의 약물은 잠시간 몸의 모든 기능을 정지시킨 후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면 전기 신호를 주어 되살아날 수 있도록 하는 효능을 지니고 있는데, 보통 3시간씩이나 몸의 기능이 정지되면 세포는 빠른 속도로 사멸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되살아나는 게 가능했던 건, 역시 나이아의 끈질긴 회복력이 한 몫했다는 듯. ... 여전히 나이아의 몸에 극단적인 실험을 진행하는 그는 나이아를 아끼지 않고 있는가?하는 질문엔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미 가족이었다. 성을 주고, 깊은 연을 느끼며. 일심동체도 이보다 더한 유대감을 느끼긴 어려울 것이라 장담할 수 있었다. 그 탓인가, 가끔 둘에게서 같은 향이 날 때도 있었다.
반영의 밖으로 내보내는 기계를 만드는 것은 반년간 그가 밤잠을 설쳐가며 매달릴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다고 한다. 19세기의 모습을 한 반영은 자원이 빈약했고, 짜증날 정도로 물리법칙이 통하지 않은 세계였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거진 기계를 완성시켜놓았다. 앞으로 길어봤자 한 달 후에 완성될 예정. 그러나 예상보다 길어지는 작업에 시하브는 그 기계의 방향성을 잠시 틀어 전파를 현실로 내보내는 것도 가능토록 했다. 즉, 영상통화처럼 반영에서 현실로 시각적 영상과 목소리를 내보낼 수 있게 된 것. 기관에서 견제가 들어오는 탓에, 무엇보다 현실에서 연락을 취할 가족 등이 없기에 시하브는 아직 사용해보진 않았다. 사용한 사람은 모종의 거래를 한 레이븐. 기관의 견제 탓에 1~2시간 정도밖에 사용할 수 없었다.
그가 만드는 기계와 약물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고, 또 왼팔을 수술해주겠단 조건으로 시하브는 레이븐에게 일종의 추상 실험을 진행했다. 공허라는 재능을 지닌 레이븐에게, 어디까지 주입할 수 있는가. 그는 추상적인 시간을 집어넣어보고자 했다. 지식 등은 이미 레이븐이 놀라울 정도로 흡수를 잘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1주에 한번 정도, 레이븐과 만나 현실의 시간을 인지하고 그것을 흡수하도록 했다. 대체로 과거의 레이븐이 지내왔던 경험을 주입하는 식. 실험이 성공한다면 레이븐은 시간을 주입받아 반영의 변화가 아닌, 현실의 성장을 이룰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실험은 실패했다. 머리길이가 증가하고, 예전의 모습으로 약간의 회귀는 있었으나 성장은 아니었던 것. 시하브는 반영에서의 성장은 불가능하다는 게 절대규칙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절대규칙이라면 과학자로서는 더 건드릴 수 없다. 시하브는 실패라는 것을 인지하자마자 늘 그랬듯, 빠르게 호기심을 잠재웠다.
실험을 하지 않는 날에는 디아네에게 찾아가 조향하는 법을 배웠다. 하는 일이 많아 분명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판인데, 시하브는 오랜만의 열정에 등떠밀려 영 쉬지를 않았다. 때문에 디아네가 향을 만들 때에는 늘 졸린듯한 모습으로 곁에 있었다. 조향방법을 자신만이 간직하기를 원하지 않는 디아네는 세심하고 자세히 향을 만드는 법을 알려주었다. 덕택에 반년의 끝자락 쯤에는 그도 어설프게나마 향을 만들 수 있었다고. 디아네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채취해 만들어준 향수(하나는 누군가에게 선물하기 위해 병을 두개에 나눠 담기를 요청했다. 선물받을 당사자는 이미 그 향수를 가지고 있는듯 했지만.)에 보답하고자 디아네의 향수를 만들어주었다. 옅은 향이나 오래도록 맡고 있으면 물 향과 함께 작은 열매를 톡톡 입안에서 터트리는 듯한 향. 달달하면서도 시원한 향이었다. 숙성될수록 달달한 향이 더 강해지는 듯. 디아네가 만든 것보다야 조잡하지만 처음 만든 향수치고는 나쁘지는 않은 편. 그야, 똑똑한 사람은 뭐든 잘하니까.
바쁜 반년을 보낸 시하브가 마지막으로, 그리고 꾸준히 했던 것은 래트와의 편지 교류였다. 이번에 래트에게서 오는 편지는 대체로 재미없다는 푸념이 대부분이었고, 실험으로 바쁜 시하브가 보낸 편지에는 실험의 근황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그러나 래트가 알아듣기에는 조금의 무리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과학을 독학한 시하브는 자신만의 용어와 암호를 거리낌없이 만들어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영에서 현실로 나가기 위해서는 기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하자, 래트에게 부탁해 반영세계로 보내는 기계의 사진을 받았다. 그것마저 조각조각 잘린 듯한 사진이 대부분이었으나, 기관이 반영세계의 독점권을 휘어잡기 위해 얼마나 삼엄한지 알고 있기에 별 다른 투정은 부리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오기 2~3주 전, 전파를 내보내 시각적 영상과 목소리를 현실로 전달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어내자마자 래트에게 ‘너의 나락은 곧 무너질거야.’라는 짧은 편지를 보냈다. 래트라면 알아차렸겠지, 시하브는 시궁쥐와 함께 무너질 나락을 구경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 소지품
수술 키트(메스, 주사기, 직접 만든 약물(캐리어로 전달된 것 포함), 냉동 혈액팩, 실험 장갑, 실험복 등), 석산, 향수를 비롯한 선물들, 인형들
♛ 관계
당신의 눈동자에는 아직 누구도 비춰지지 않은 모양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