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허 밑에는 한 줌의 후회가 남았어.

드높은 하늘을 정복하여 활개치는 거대한 까마귀
♛ 달라진 점
같은 인물이 맞던가 싶을 정도로 조용하게 변했다. 얼핏 차분함처럼 보이기도 하는 고요함의 실체는 체념이며, 누가 무어라 해도 감정 변화의 폭이 크지 않게 되었다. 이전처럼 아귀가 맞지 않는 말을 하는 일도 없다. 제 본질을 더는 부정하지 않는다. 완전하게 비어버린 것이다.
공허로서의 자신을 자각하고 나자, 어째서 자신이 이토록 쉽게 무언가를 배우고 익힐 수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텅 비어있는 곳에 무언가를 쏟아넣는 것만큼 쉬운 일이 있을리가.
죽음의 무게를 느끼지 못한다. 죽고 사는 일은 눈을 뜨는 것 만큼 당연한 일이다.
머리와 눈색이 하얗게 변했다.
왼팔을 움직이지 못한다.
♛ 경험
체스말들이 이 세계를 떠난 동안, 총 52회의 사망을 겪었다.
처음, 아니 두번째 겪는 사망은 두려웠다. 정의를 자처하는 이에게 분풀이로 죽는 것은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제정신이 아니었으므로 복수를 다짐하는 일은 없었고, 오두막 바깥을 진전하던 그를 누군가 도와주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죽은 일이 10번을 넘어가자 레이븐에게 눈에 띄는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검고 붉었던 색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망을 거듭할 때마다 속이 거덜나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양 하얗게 변해갔다.
20번을 넘기자, 더는 제 목숨에 가치를 매기지 않게 되었다. 가끔 흐리던 눈이 맑아지는 날이면, 저를 죽이러 오는 살해자의 품에 비수를 꽂아 넣었다. 작은 분노의 표현이었다. 저 외에도 사망을 겪는 이들이 있었으므로 그들과 간간히 대화를 나누며 친분을 유지했다. 덕분에 자아를 온전히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을까.
40번을 넘기고서, 제게서 더는 색을 찾아볼 수 없음을 알았다. 아무래도 좋았다. 또다른 이름에 걸맞는 모습이 된게 아닐까. 새하얀 눈에는 무엇도 담기지 않는다. 사망 직전에서 방치되는 일도 더러 있었으므로 쉽고 빠른 자결법을 익히게 되었다.
가장 최근에 와서는 시마무라 하스미에게 왼팔을 베였다. 힘줄이 끊어진 정도에 불과해 굳이 사망을 겪고 다시 살아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과연 남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게는 그렇다.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동안, 거울 밑은 지옥이었다.
♛ 소지품
여태 받아온 모든 소지품을 버리려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나이아 에이엔에게서 받은 자결을 위한 가시 하나
♛ 관계
✦ 내기 아닌 내기 ✦
황혼 ✦ 황혼, 그러니까 내 맘대로 부르면 아침이랑 내기 아닌 내기를 하기로 했어. 싫어하는게 뭐냐는 잡담에서부터 아침이 지독한 뭔가에 단단히 얽매여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뭐야. 그리고 그걸 벗어날 방법은 죽음 뿐이라고 단언하는데~ 어마어마한 호기심이 돋던 거 있지? 그래서 하나 재밌는 내기를 만들었지. 아침이 자신의 얘기를 조금씩 들려주면, 나는 천재적인 두뇌를 발휘해서 그녀가 뭘 해왔고 어떤 사람인가를 밝혀내기로. 기한은 아침이 죽기 전까지야. 캬하하핫! 무척 흥미진진하지 않아? 너무 기대돼!
✦ 참을 인 세 번이면 연락처 공개도 면한다! ✦
시마무라 하스미 ✦ 참을 인 세 번이면 연락처 공개도 면한다!/이름하야 더블 윈-윈인 관계! 시마무라랑 약속을 하나 했어~! 내가 시마무라의 '성격 죽이기 도우미'가 되어 시마무라가 좀 더 조신하게 말할 수 있도록 돕는 거야. 그와 동시에 그가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지켜보면서 나는 내 나름대로 흥미를 충족하는…. 누구 하나 아쉬울게 없는 약속이지! 원래는 바깥에서 하자고 제안한 건데, 적당히 합의를 거치다보니 연락처는 받을 수 없게 됐지. 대신 긍지 높은 시마무라가 v스스로v 다른 조건을 걸어줬어. 약속 기간 동안 '자신이 화를 내면 연락처를 주겠다'고. 물론 나야 재밌을 것 같으니 냉큼 수락했지~! 흠, 흠. 근데 그거 알고 있을까 몰라? 우리는 약속 기간을 정확하게 정하지 않았는데. 크… 캬캬… 으하하하하하햣! 아, 벌써부터 너무 즐거워! 난 역시 네가 엄청 좋아!
✦ 맹세 ✦
닐바서스 L. 알프헤임 ✦ '내가 죽어서 이곳의 주민이 된다면 너는 어떻게 반응할까?'로 시작한 우리의 대화는 내 안위 걱정까지 갔고, 결국 '거짓말 하지 말라', '죽지 말라'는 약속을 요구 받기에 이르렀어~! 나야 늘 사실만 이야기하니까, 거짓말 쪽은 패스한다고 치더라도~ 냉정하게 말해서, 이 세계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잖아? 그래서 난 요구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대신 '흥미에 미쳐 남을 직접 죽이지 않을 것', '자결하지 않을 것', '믿음을 저버리지 않을 것'으로 조각조각 나누어 냈지. 그러고 나니까 한 가지 변덕을 부리고 싶어지더라고~? 난 네게 '죽지 말라'고 약속할 것을 종용했고, 그리고…….
네가 한 맹세를 반드시 지키리라 믿어, 친애하는 닐바서스.
✦ 욕심을 위한 욕심 ✦
디어 카사블랑카 ✦ 반영의 주민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현실세계로 갈 친구들을 떠나보냈다. 모든 것을 포기해가던 찰나였으나 디어는 내가 저를 끌어냈던 마냥 나를 끌어올리고 말겠다고 선언하고 갔지. 솔직히, 그다지 기대가 가는 얘긴 아니었다. 그러고서 6개월이 지났어. 그동안 나는 살육전에 휘말려 수도 없는 죽음을 겪으며 내 속을 비워나갔고, 재회를 했을 때는 이미 죽음에 무뎌져 아무래도 좋은 상태가 되어 있었다. 디어는 그런 내가…. ……흠. …안타까운… 것이 맞나? 잘 모르겠지만, 묘한 표정을 지으며 친구로서의 내 행복과 구원을 바란다고 했다. 그러고선 여전히 제가 좋냐고 물어봤어. 확신할 순 없었지만, 반 년전의 선언이 떠올라 '그렇다'고 대답했고, 너는 반영 바닥에서 지워져가는 나에게 버틸 희망을 준답시고 '자신을 원하라'고 요구했다. 기다리든, 죽이고 싶어하든, 어쨌든 좋으니 자신을 생각하며 욕심을 가지고, 인간답게 살아가기를 원했던 것… 같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게 네 행복이라면 나는 긍정하려 노력하겠어. 내 욕심은 네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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