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면허는 따고 하는 얘기겠지, 란비르~?

드높은 하늘을 정복하여 활개치는 거대한 까마귀
♛ 달라진 점
반 년 전과 마찬가지로 차분하다. 그러나 농담을 던질 수 있을 만큼 상당히 여유있는 모습을 갖게 되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체념이 기본 전제인 것은 맞지만, 눈 앞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들리는 얘기를 외면할 정도는 아니다. 희노애락을 조금 더 빨리 구분하고 표현할 수 있게 됐다. 자존감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으며 흥미 본위의 성격도 근근히 모습을 드러낸다.
이 변화의 원인으로는 두 가지를 추측할 수 있다. 하나, 주변인들의 극성적인 애정과 그것을 굳이 회피하지 않은 점. 둘, 그가 시하브 카얄과 행한 실험으로부터 나온 부산물. 어느 쪽이든, 주변인들이 보았을 때 긍정적인 변화라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죽음에 대한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것과, 자신을 천재라 불렀을 때 부정적 혹은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여전하다.
왼팔이 나았다. 다친지 꽤 된 상태였으므로 흉터가 짙게 남았다.
머리가 약간 길었고, 키가 커졌으며 약간의 검은 빛이 차올랐다. 반영의 주민이므로 이는 자연적인 성장이 아니다.
재능이 공허라면, 공허를 흩어지지 않도록 붙드는 개념이 레이븐이라는 존재. 그가 가지고 있던 특징은 의식하지 않는 사이에 겉으로 드러나곤 한다. 자신의 본질에 친숙해지며 이러한 사실을 깨달았고, 최근에는 공허의 ‘무엇이든 넣을 수 있다’는 긍정적인 면을 활용점으로써 고려해보는 중.
♛ 경험
다시 사망을 연거푸 할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제법 평온한 삶을 지냈다. 일지 쓰기, 요리해보기, 식사를 즐기기, 산책하기……. 현실 세계에서 온 퀸들과 나눈 약속은 전부 이행했다. 와중에는 의미를 찾은 것도, 찾지 못한 것도 있다.
[실험]
시하브의 ‘공허라는 재능에 무엇을, 어디까지 채워넣을 수 있는가’를 주제로 한 실험에 나를 사용하는 것을 허락했다. 난 이 실험에서 추상의 개념인 ‘시간’을 주입받았다. 현실적으로 생각 했을때, 추상 개념을 물질마냥 주입시킨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얘기였다만, 그가 어떤 이름의 퀸인지를 생각해보면 정상적으로 진행할 수 있다는 것에 어렵잖게 수긍이 갈 거야. 지식 따위는 모조리 흡수해버리는 내 본질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겠지. 매주, 시하브를 만나 현실의 시간을 인지하도록 지도받았다. 그리고… 온전히 받아들이기를 요구받았지. 대체로 내 과거의 경험을 추출하여 내게 흡수시키는 식이었다. 실험이 진행되면 될 수록 이전의 내가 선명히 느껴졌고, 모습과 성격 역시 그와 가까워졌다…. 머리가 자라는 것을 눈치챘을 때는, 실험이 성공한 줄 알았으나… 성장이 아닌 단순 변화였음을 깨닫고서 실패로 결론지었다.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는 성장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반영 세계를 구성하는 규칙 중 하나를 깨달았다. 그렇다면 더 궁금해할 이유 역시 없겠지.
[대가]
그리고 나는 위의 실험에서 나 자신을 실험체로 제공한 것을 대가로, 시하브가 진행하고 있던 ‘반영 세계를 나가는 실험’에 동참했다. 규칙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공간에서 다른 세계로 물질을 전이한다는 건 상당한 어려움이 따를 터였다. 그래서 큰 기대 않고 방관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도 그의 재능에 경의를 표해야 할련지! 시행착오 단계에 오른 그의 기계는 사용자의 목소리나 영상을 외부로 송출할 수 있었어. 반영을 관리하는 기관의 견제가 있는 탓에 긴 시간은 사용할 수 없고, 1~2시간의 사용을 허락받았다. 우선, 래트를 통해 하려 했던 부고 전하기를 내가 직접 했다. 형은 놀라는 기색이었지만, 내가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세계에 탐사를 가곤 했던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비보에도 크게 통탄하진 않았다. 되려 이후의 내 행보에 기대를 거는 눈치였지……. 그는 나보다 성격이 좋지 않은 사람이었으므로, 목적을 달성함과 동시에 빠르게 송출을 그만두었다. 여유가 생기자 다른 이의 안부를 확인할 생각이 들었다. 지금쯤 즉위를 마쳤을 닐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위로의 의미로 준 귀걸이는 잘 쓰고 있을지 모르겠네. 더 고민할 것도 없이 저쪽의 상황을 확인했고, 아니나 다를까 갓 취임해서 누가 주변에 나타난 것도 모를 정도로 일에 열중하고 있더군. 닐이 보는 것이 일하다 지쳐 나타난 환각이 아님을 설명하고, 약간의 안부를 주고 받았다. 상당히 지쳐보였다만, 괜찮은 건가? 내 변화를 눈치 챈 듯 하여 최근 있었던 일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함께 머지 않을 미래에 반영으로 내려와 직접 확인하기를 권했다. 더 할 말이 없었으므로, 불필요한 송출 역시 그만 두었다. 몸 성히 지내라. 나중에 보지.
[재활]
본디 손을 댈 예정이 없었다만, ‘내가 아픈 것도 죽는 것도 맘에 들지 않는다’는 얘길 듣고서 왼팔을 어떻게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암만 다재다능한 과거를 가진 나라 해도, …한 손만으로 다른 팔을 고친다는 건 무리야. 그러므로 시하브에게, 실험체로써의 대가를 치룸과 동시에 팔의 수술을 해주기를 요구했다. 기실 죽어서 말끔하게 낫는 것이나 이렇게 나아지나 별반 다른 점을 모르겠다. 검상이 뚜렷하게 남고 약간 굼뜬 반응을 보이지만, 적어도 아프지는 않아…. 고맙군.
[편지]
디어와 편지를 주고 받았어. 좋아하는 인물과의 지속적인 연락은 당연한 일이지. 반영을 다음 보금자리로 여기는 만큼, 반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꽤 궁금한 눈치였다. 적어도 내 눈 안에서는 별 일 없는 상태라고 전해주었다. 그리고 내 근황을 담았는데, 그가 시하브 카얄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실험에 대해서는 일체 함구했다. …뭐. 어차피 온다면 알게 되겠지만. 그다지 위험하지도 않았고, 굳이 미리 걱정을 끼치고 싶진 않았고 말이다. 수신하는 편지에서는 다소… 걱정스러운 내용이 많았는데, 알다시피 내게는 남을 위로한 경험이 많지 않았기에 이러저러한 예시들을 들어가며 마음을 놓도록 도와보았지. 그러다보니 내게 감정적 변화가 생기고 있음을 몸소 체감할 수 있더군. 스스로가 느낄 정도니 편지를 받아보고 있을 디어 역시 느낄 수 있을 터이다. 무슨 일들이 이렇게 많이 벌어졌는지, 받아보는 양은 늘 두둑했다. 아, 그 안에는 우리가 현실을 오고 다닐 적에 들렀던 그리스의 사진들도 들어있었는데, …의도가 대강 짐작이 되더라고. 괜히 그리워졌다. 우리는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룸메이트]
우리는 사상과 성격이 심히 달라 여지껏 상당한 거리를 두었다. 정확히는 내가 두었다고 하는 쪽이 맞을까. 그래, 이건 란비르 칸과 나의 얘기다. 방으로 돌아가겠다고 약속했고, 이렇다 할 살인도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나는 C2에서 긴 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유일 생존자임을 빌미로 모두 내쫓았던 것이 대체 언젯적의 얘기였더라. 소원했던 사이는 급격히 좁혀져 일어나는 것부터 해서 다른 퀸들과 약속했던 산책, 일기 쓰기까지 함께 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하아. 내가 하는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는 사실을 깜빡했군. 내가 당번인 날이 오기만을 그렇게, 눈에 띄도록 좋아하면 난 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하냔 말이다. 간혹 리스트까지 가져오는 날이 있는데, 기가 찬다. ……이제는 이 일상에 적응해야겠어.
[내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2]
생지옥과도 같은 시기를 함께 보낸 사람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에이엔은 특히, 내가 해주곤 했던 요리를 좋아하지. 뭔갈 받을 생각일랑 전혀 없었다만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머리를 다듬어주는 것을 대가로 받게 생겼다. 대가를 받으니만큼, 앞으로도 제공해주는게 좋겠어. 늘 최선을 다해 만들기에, 부지기수로 늘어나는 조리 과정이 상당히 귀찮지만…, 친구와 식사를 하는 시간만은 나쁘지 않다. 아니, 좋은 편이지. 다른 이들에게 적대적인 에이엔이 지금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도 조금씩 물어보곤 한다.
[102전, 102승]
나데시코, 아니, …센게 마이. 그는 자꾸만 할 말이 없다는 내게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다보니 ‘대체 다른 피스들이 왜 나를 신경쓰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해버렸고, 이 얘기는 그의 사후까지 이어졌다. 본래 살아남아 현실로 갔을 센게가 반 년마다 와서 질문을 하고, 나는 그에 답할 예정이었다만 이렇게 된 이상…… …아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할 수 없다. 모르겠어. 그래서 직접적으로 정답을 알려줄 것을 요구했는데, 그의 대답으로 돌아온 것은 정답이 아니라 웬 내기였다. 나와 게임을 해서 그가 이기면 알려주겠다는 것. 어쩐지, …조건이 꽤 이상한… 것 같은데, 네가 이상한 적이 하루 이틀이었나…? …아아아. 물론 나는 대면식 게임을 성의없이 하지 않는다. 그건 상대에 대한 모욕이거든. 내가 종목으로 고른 체스가 그에게는 대단한 맹점이었는지 매 국면마다 이기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 상당히 재밌었다. 어쩌면 남에 대한 예의 따위는 말 뿐인 핑계고 이걸 즐기느라 지지 못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실력 차이가 너무 나는 나머지 몇 수 가르쳐주기까지 했지. 그래서, 지금이 몇 번째더라. 102전 102승인가? 오래 게임을 하다보니 내게는 남들을 이해할 여력이 생겼고, 이제는 센게가 말하지 않아도 정답을 아는 상태다. 내가 너희의 ‘소중한 친구’이기 때문이겠지. 그런데, 그런데… ……감정의 감각이 선명해지는 동시에 부끄러움까지 선명해져버려서, ……그런 걸 대체 어떻게 멀쩡하게 말하느냐고?! 못해! 차라리 게임을 계속하자, 센게!
♛ 소지품
여태 받아온 모든 소지품을 버리려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나이아 에이엔에게서 받은 자결을 위한 가시 하나
♛ 관계
✦ 내기 아닌 내기 ✦
황혼 ✦ 황혼, 그러니까 내 맘대로 부르면 아침이랑 내기 아닌 내기를 하기로 했어. 싫어하는게 뭐냐는 잡담에서부터 아침이 지독한 뭔가에 단단히 얽매여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뭐야. 그리고 그걸 벗어날 방법은 죽음 뿐이라고 단언하는데~ 어마어마한 호기심이 돋던 거 있지? 그래서 하나 재밌는 내기를 만들었지. 아침이 자신의 얘기를 조금씩 들려주면, 나는 천재적인 두뇌를 발휘해서 그녀가 뭘 해왔고 어떤 사람인가를 밝혀내기로. 기한은 아침이 죽기 전까지야. 캬하하핫! 무척 흥미진진하지 않아? 너무 기대돼!
✦ 참을 인 세 번이면 연락처 공개도 면한다! ✦
시마무라 하스미 ✦ 참을 인 세 번이면 연락처 공개도 면한다!/이름하야 더블 윈-윈인 관계! 시마무라랑 약속을 하나 했어~! 내가 시마무라의 '성격 죽이기 도우미'가 되어 시마무라가 좀 더 조신하게 말할 수 있도록 돕는 거야. 그와 동시에 그가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지켜보면서 나는 내 나름대로 흥미를 충족하는…. 누구 하나 아쉬울게 없는 약속이지! 원래는 바깥에서 하자고 제안한 건데, 적당히 합의를 거치다보니 연락처는 받을 수 없게 됐지. 대신 긍지 높은 시마무라가 v스스로v 다른 조건을 걸어줬어. 약속 기간 동안 '자신이 화를 내면 연락처를 주겠다'고. 물론 나야 재밌을 것 같으니 냉큼 수락했지~! 흠, 흠. 근데 그거 알고 있을까 몰라? 우리는 약속 기간을 정확하게 정하지 않았는데. 크… 캬캬… 으하하하하하햣! 아, 벌써부터 너무 즐거워! 난 역시 네가 엄청 좋아!
✦ 맹세 ✦
닐바서스 L. 알프헤임 ✦ '내가 죽어서 이곳의 주민이 된다면 너는 어떻게 반응할까?'로 시작한 우리의 대화는 내 안위 걱정까지 갔고, 결국 '거짓말 하지 말라', '죽지 말라'는 약속을 요구 받기에 이르렀어~! 나야 늘 사실만 이야기하니까, 거짓말 쪽은 패스한다고 치더라도~ 냉정하게 말해서, 이 세계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잖아? 그래서 난 요구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대신 '흥미에 미쳐 남을 직접 죽이지 않을 것', '자결하지 않을 것', '믿음을 저버리지 않을 것'으로 조각조각 나누어 냈지. 그러고 나니까 한 가지 변덕을 부리고 싶어지더라고~? 난 네게 '죽지 말라'고 약속할 것을 종용했고, 그리고…….
네가 한 맹세를 반드시 지키리라 믿어, 친애하는 닐바서스.
✦ 욕심을 위한 욕심 ✦
디어 카사블랑카 ✦ 반영의 주민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현실세계로 갈 친구들을 떠나보냈다. 모든 것을 포기해가던 찰나였으나 디어는 내가 저를 끌어냈던 마냥 나를 끌어올리고 말겠다고 선언하고 갔지. 솔직히, 그다지 기대가 가는 얘긴 아니었다. 그러고서 6개월이 지났어. 그동안 나는 살육전에 휘말려 수도 없는 죽음을 겪으며 내 속을 비워나갔고, 재회를 했을 때는 이미 죽음에 무뎌져 아무래도 좋은 상태가 되어 있었다. 디어는 그런 내가…. ……흠. …안타까운… 것이 맞나? 잘 모르겠지만, 묘한 표정을 지으며 친구로서의 내 행복과 구원을 바란다고 했다. 그러고선 여전히 제가 좋냐고 물어봤어. 확신할 순 없었지만, 반 년전의 선언이 떠올라 '그렇다'고 대답했고, 너는 반영 바닥에서 지워져가는 나에게 버틸 희망을 준답시고 '자신을 원하라'고 요구했다. 기다리든, 죽이고 싶어하든, 어쨌든 좋으니 자신을 생각하며 욕심을 가지고, 인간답게 살아가기를 원했던 것… 같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게 네 행복이라면 나는 긍정하려 노력하겠어. 내 욕심은 네가 될 것이다.




